잭 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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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잭 린치는 아일랜드의 정치인이자 운동선수였다. 1917년 코크에서 태어나 게일 풋볼과 헐링 선수로 활약하며 여러 차례 우승을 거두었고, 1930년대 후반에는 코크 시니어 허링 팀과 시니어 풋볼 팀에서 모두 활동했다. 1948년에는 아일랜드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어 교육부 장관, 산업·통상부 장관, 재무부 장관을 역임했으며, 1966년부터 1973년, 1977년부터 1979년까지 아일랜드 총리를 지냈다. 총리 재임 기간 중 유럽 경제 공동체 가입을 이끌었으며, 북아일랜드 분쟁 및 무기 위기 등 다양한 정치적 문제에 직면했다. 1981년 정계에서 은퇴 후 여러 기업의 이사로 활동했으며, 1999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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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 린치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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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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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존 메리 린치 |
출생 | 1917년 8월 15일 |
출생지 | 코크, 아일랜드 |
사망 | 1999년 10월 20일 |
사망지 | 더니브룩, 더블린, 아일랜드 |
안장지 | 세인트 핀바르 묘지, 코크, 아일랜드 |
국적 | 아일랜드 |
정당 | 피아나 팔 |
배우자 | 마린 오코너(1946년 결혼) |
교육 | 코크 기독교 형제회, 노스 수도원 |
공직 | |
대통령 | 패트릭 힐러리 |
타나이스트 | 조지 콜리 |
임기 시작 | 1977년 7월 5일 |
임기 종료 | 1979년 12월 11일 |
이전 | 리암 코스그레이브 |
다음 | 찰스 호히 |
대통령 | 에이먼 데 발레라 |
임기 시작 | 1966년 11월 10일 |
임기 종료 | 1973년 3월 14일 |
이전 | 숀 레마스 |
다음 | 리암 코스그레이브 |
총리 | 리암 코스그레이브 |
임기 시작 | 1973년 3월 14일 |
임기 종료 | 1977년 7월 5일 |
이전 | 리암 코스그레이브 |
다음 | 가렛 피츠제럴드 |
임기 시작 | 1966년 11월 10일 |
임기 종료 | 1979년 12월 7일 |
이전 | 숀 레마스 |
다음 | 찰스 호히 |
총리 | 숀 레마스 |
임기 시작 | 1965년 4월 21일 |
임기 종료 | 1966년 11월 10일 |
이전 | 제임스 라이언 |
다음 | 찰스 호히 |
총리 | 숀 레마스 |
임기 시작 | 1959년 6월 23일 |
임기 종료 | 1965년 4월 21일 |
이전 | 패트릭 힐러리 |
다음 | 찰스 호히 |
총리 | 에이먼 데 발레라 |
임기 시작 | 1957년 3월 20일 |
임기 종료 | 1959년 6월 23일 |
이전 | 리처드 멀케이 |
다음 | 패트릭 힐러리 |
총리 | 에이먼 데 발레라 |
임기 시작 | 1957년 3월 20일 |
임기 종료 | 1957년 6월 26일 |
이전 | 패트릭 린지 |
다음 | 미할 오 모라인 |
하위 사무실 | 정부 |
임기 | 1951–1954 |
하위 사무실 | 토지 |
임기 | 1951–1954 |
임기 시작 | 1977년 6월 |
임기 종료 | 1981년 6월 |
선거구 | 코크 시 |
임기 시작 | 1969년 6월 |
임기 종료 | 1977년 6월 |
선거구 | 코크 시 북서부 |
임기 시작 | 1948년 2월 |
임기 종료 | 1969년 6월 |
선거구 | 코크 자치구 |
2. 초기 생애 및 스포츠 경력
잭 린치는 어린 시절부터 럭비 유니온, 축구, 수영, 핸드볼 등 다양한 스포츠를 즐겼지만, 특히 게일 풋볼과 허링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1943년 글렌가리프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 미래의 아내인 마이린 오코너를 만났다. 그녀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전사한 해군 의사의 딸이었다. 1946년 8월 10일 결혼한 두 사람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다.
19세에 코크 순회 법원에서 서기로 일하며 법률에 관심을 갖게 된 린치는 1941년 코크 국립대학교에서 법학 야간 과정을 시작했다. 2년 후 더블린으로 옮겨 킹스 인에서 학업을 마쳤으며, 법무부에서 일하며 학업을 이어갔다. 1945년 변호사 자격을 얻은 후 동전 던지기로 진로를 결정, 코크로 돌아가 개인 변호사 업무를 시작했다.
2. 1. 유년 시절
'''잭 린치'''(영어: Jack Lynch영어, Seán Ó Loingsigh|숀 오 렁시ga)는 1917년 8월 15일 코크 셔던에서 재단사였던 아버지 대니얼 린치와 재봉사였던 어머니 노라 (옛 성씨: 오도노휴) 사이에서 태어났다.[3] 그는 형제자매 7명 중 다섯째이자 다섯 아들 중에서는 막내였다. 린치는 피콕 레인에 있는 성 빈센트 수녀원과 노스 몬 그리스도교 형제회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린치가 13살이었을 때 그의 어머니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고, 여섯 자녀를 둔 그의 고모가 가족을 돌보기 위해 나섰다. 린치는 1936년에 졸업 시험을 치른 후 더블린으로 이주하여 더블린 지방 우유 위원회에서 일했으며, 이후 코크로 돌아와 순회 법원 사무소에서 자리를 잡았다.[3]2. 2. 스포츠 경력
린치는 글렌 로버스와 세인트 니콜라스 클럽에서 선수로 활동하며 여러 차례 우승을 경험했다. 글렌 로버스 소속으로 1934년부터 1950년까지 헐링 선수로 활동하며 1934년 코크 시니어 헐링 선수권 대회 우승을 시작으로 8회 연속 우승을 이끌었고, 1948년, 1949년, 1950년에도 우승을 추가했다. 세인트 니콜라스 소속으로는 1934년부터 1951년까지 풋볼 선수로 활동하며 1938년과 1941년에 코크 시니어 풋볼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했다. 1940년대 중반에는 더블린에서 근무하며 Civil Service GAA 팀에서 풋볼 선수로 활동, 1944년 믹 팔비와 함께 더블린 시니어 풋볼 선수권 대회 우승을 차지했다.[1]코크 카운티 대표팀 선수로서는 1936년부터 1950년까지 헐링, 1939년부터 1949년까지 풋볼 선수로 활동하며 이중 선수로 명성을 떨쳤다. 특히 1939년에는 풋볼과 헐링 팀 주장을 동시에 맡는 유일한 선수였다. 헐링에서는 1939년, 1942년, 1943년, 1944년, 1946년 먼스터 시니어 허링 선수권 대회 우승, 1940년, 1941년, 1948년 내셔널 허링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특히 1941년부터 1944년까지 올-아일랜드 시니어 허링 선수권 대회 4연패를 달성했고, 1946년에도 우승하여 총 5번의 올-아일랜드 헐링 우승을 차지했다. 풋볼에서는 1943년과 1945년 먼스터 시니어 풋볼 선수권 대회 우승을 이끌었고, 1945년 올-아일랜드 시니어 풋볼 선수권 대회에서 케번을 꺾고 우승하며 풋볼에서도 올-아일랜드 우승을 달성했다. 1946년 9월, 린치는 6개의 시니어 올-아일랜드 메달(헐링 5개, 풋볼 1개)을 연속으로 획득한 최초의 선수가 되었다.[1]
린치의 주요 스포츠 경력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종목 | 팀 | 기간 | 주요 우승 |
---|---|---|---|
헐링 | 글렌 로버스 | 1934–1950 | 코크 시니어 헐링 선수권 대회 (11회) |
코크 | 1936–1950 | 먼스터 시니어 허링 선수권 대회 (6회), 올-아일랜드 시니어 허링 선수권 대회 (5회), 내셔널 허링 리그 (3회) | |
풋볼 | 세인트 니콜라스 | 1934–1951 | 코크 시니어 풋볼 선수권 대회 (2회) |
Civil Service GAA | 1943–1944 | 더블린 시니어 풋볼 선수권 대회 (1회) | |
코크 | 1939–1949 | 먼스터 시니어 풋볼 선수권 대회 (2회), 올-아일랜드 시니어 풋볼 선수권 대회 (1회) |
1948년 총선에서 잭 린치는 코크 자치구에서 최고 득표를 기록하며 피아나 페일 소속 하원 의원이 되었다.[5] 피아나 페일은 선거에서 패배했지만, 린치는 당 대표 에이먼 데 발레라의 연설문 작성 및 연구 보조를 맡았다.
3. 정치 입문 및 초기 경력
1951년, 피아나 페일이 집권하면서 린치는 정부 의회 서기로 임명되어 게일타흐트 지역을 담당했다.[6] 1954년부터 1957년까지는 야당에서 게일타흐트 담당 대변인을 역임했다. 1957년 총선으로 피아나 페일이 재집권하고 데 발레라가 마지막 정부를 이끌 때, 린치는 교육부 장관으로 승진하여 게일타흐트 담당도 겸임했다.
3. 1. 법조 경력
린치는 19세에 코크 순회 법원에서 서기로 일을 시작했다.[3] 법원에서 일하면서 법률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고, 1941년에 코크 국립대학교 야간 법학 과정을 시작하여 법학회 회원으로 활동했다. UCC에서 2년간 공부한 후 더블린으로 옮겨 킹스 인에서 학업을 마쳤다. 학업을 계속하는 동안 법무부에서 일했다. 1945년 변호사 자격을 얻었고, 공무원 직을 유지할지 아니면 변호사로 활동할지 결정해야 했다. 린치는 동전 던지기로 결정하여 코크로 돌아가 코크 순회 법원에서 개인 변호사 업무를 시작했다.[3]
3. 2. 정계 입문
1948년 2월 총선에서 잭 린치는 코크 자치구 선거구에서 최고 득표를 기록하며 13대 다일에서 피아나 페일 국회의원이 되었다.[5] 정치 입문 전, 린치는 지역 피아나 페일 쿠만과 클란 나 포블라크타로부터 출마 제안을 받았으나 정치 경험 부족을 이유로 고사한 적이 있었다. 총선에서 피아나 페일은 패배했지만, 린치는 당 대표인 에이먼 데 발레라의 연설문 작성자이자 연구 보조원이 되었다.
1951년, 피아나 페일이 다시 집권하면서 린치는 정부 의회 서기로 임명되어 게일타흐트 지역을 특별 관할하게 되었다.[6] 1957년 총선 이후 피아나 페일이 다시 집권하고 데 발레라가 마지막 정부를 이끌었을 때, 린치는 교육부 장관으로 내각에 승진했으며, 잠시 동안 게일타흐트 관할도 겸했다. 39세의 그는 정부 최연소 구성원이었다. 린치는 교육부 장관으로서 학교 졸업 연령 상향, 학급 규모 축소, 기혼 여성의 교사 근무 금지 해제, 유대교 스컬 캡(skull cap) 착용 허용(단, 12세 이상부터) 등 혁신적인 법안을 도입했다.
4. 산업·통상부 장관 및 재무부 장관 (1959-1966)
1959년 에이먼 데 발레라가 아일랜드 대통령으로 선출되면서 숀 레마스가 그의 뒤를 이어 총리이자 피어너 팔 대표가 되었다. 린치는 1959년 6월 23일부터 1965년 4월 21일까지 산업·통상부 장관을, 1965년 4월 21일부터 1966년 11월 10일까지 재무부 장관을 역임했다.
(산업·통상부 장관 및 재무부 장관 시절의 자세한 내용은 하위 섹션을 참조)
4. 1. 산업·통상부 장관 (1959-1965)
숀 레마스가 총리이자 피아나 페일 대표가 된 후, 1959년 린치는 산업통상부 장관으로 승진했다.[1] 이 직책에서 그는 정부 내에서 가장 역동적인 부서를 물려받았다.[1] 린치는 혁신적인 장관은 아니었지만, 법안과 세부 사항에 관해서는 세심했다고 묘사되었다.[1] 그는 이 부서에서 레마스 및 T. K. 휘태커와 긴밀히 협력하여 경제 성장과 확장을 위한 프로그램을 구현했다.[1] 또한 재임 기간 동안 여러 산업 분쟁을 해결하는 데 능숙했던 것으로 알려졌다.[1]4. 2. 재무부 장관 (1965-1966)
1965년, 리마스는 다시 한번 총리로 재선되었다. 제임스 라이언과 숀 맥엔티와 같은 정치 거물들이 은퇴하면서 큰 변화가 있었고, 린치는 전임자의 뒤를 이어 재무부 장관직을 맡게 되었다. 리마스가 총리직 임기를 마칠 무렵 후임자를 준비하려 했기 때문에 이 임명은 특히 중요했다. 결과적으로 린치는 정부 내 두 번째로 중요한 자리를 맡아 여러 분야에서 폭넓은 경험을 쌓았고, 리마스와 함께 런던을 방문하여 아일랜드와 영국 간의 가장 중요한 무역 협정 중 하나에 서명했다.[1]도노 오말리 교육부 장관이 정부가 모든 사람에게 무상 중등 교육을 제공할 것이라고 발표했을 때, 재무부 장관으로서 린치의 권위가 훼손된 것으로 여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러한 제안은 그러한 서비스에 자금을 지원하는 데 필요한 내각 수준에서 논의되지 않았다. 이후 리마스가 내각의 논의 없이 이 결정을 미리 동의했다는 것이 밝혀졌다.[1]
5. 아일랜드 총리 (1966-1973, 1977-1979)
1966년 숀 레마스의 뒤를 이어 피어너 팔 대표 및 아일랜드의 타오이섹으로 선출되었다.[19] 레마스의 은퇴로 인한 당내 분열을 막기 위한 타협 후보였던 린치는, 찰스 호이, 조지 콜리, 닐 블레이니 등 다른 후보들을 제치고 대표로 선출되었다. 린치는 콜리와의 경선에서 52대 19로 승리했다.
린치는 "임시 총리"라는 인식을 불식시키고 장기 집권 의지를 드러냈다. 그는 레마스 내각을 유임시키고, 각료들에게 자율성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정부를 운영했다. 또한 레마스의 현대화 정책을 이어갔지만, 그 속도는 더뎠다.
1968년, 피아나 페일은 비례대표제를 폐지하고 단순 다수 대표제로 선거 제도를 변경하려 했으나, 야당의 반대와 국민투표 부결로 실패했다. 그러나 1969년 총선에서 피아나 페일이 과반수를 확보하면서 린치는 자신의 정치적 역량을 입증했다.
린치는 1966년부터 1973년까지, 그리고 1977년부터 1979년까지 두 차례 총리직을 수행했다. 1973년 총선에서 패배하여 야당 대표를 역임하기도 했지만, 1977년 총선에서 다시 승리하여 총리직에 복귀했다.
두 번째 임기 동안 린치는 경제 문제와 당내 갈등에 직면했다. 1979년 유럽 의회 선거에서 피아나 페일이 저조한 성적을 거두고, 우편 파업과 임시 IRA의 테러 등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린치는 1979년 12월 5일 피아나 페일 대표직에서 사임했고, 찰스 호이가 후임 대표 및 타오이섹이 되었다. 린치는 1981년 총선까지 하원 의원으로 재직했다.
5. 1. 첫 번째 임기 (1966-1973)
피아나 페일은 1966년 잭 린치를 일종의 "타협 후보"로 선출했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가 임시 타오이셔흐(Taoiseach)로만 재임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린치는 "임시 총리"라는 칭호를 싫어했으며, 장기 집권 의지를 분명히 했다. 그는 숀 레마스 내각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각료들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도록 하는 의장과 같은 방식으로 정부를 운영했다. 린치는 레마스가 시작한 현대화 정책을 이어갔지만, 더 느린 속도로 진행했다.[7]1968년, 피아나 페일은 비례대표제를 폐지하고 영국식 단순 다수 대표제로 변경하려는 시도를 했다. 그러나 야당인 피네 게일과 노동당은 이것이 피아나 페일의 장기 집권을 위한 것이라며 반대했고, 국민투표 결과 부결되었다. 이로 인해 린치의 정치적 능력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1969년 총선에서 피아나 페일이 과반수를 확보하면서 린치는 자신의 능력을 입증했다.
린치의 첫 임기 동안 북아일랜드 분쟁은 중요한 과제였다. 린치는 북아일랜드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했지만, 1969년 북아일랜드에서 폭력 사태가 발생하면서 상황이 악화되었다. 린치는 "아일랜드 정부는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다"는 유명한 연설[9]을 통해 북아일랜드 문제에 대한 적극적인 개입 의지를 표명했다. 그러나 실제 군사 개입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북아일랜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피의 일요일 사건 이후, 더블린 주재 영국 대사관이 불타는 등 아일랜드-영국 관계는 악화 일로를 걸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린치는 유럽 경제 공동체(EEC) 가입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1973년, 아일랜드는 국민투표를 통해 EEC 가입을 결정했으며, 이는 린치와 그의 전임자 숀 레마스가 추진해 온 오랜 노력의 결실이었다. 패트릭 힐러리는 아일랜드 초대 유럽 연합 집행위원으로 임명되었다.
5. 1. 1. 북아일랜드 분쟁
북아일랜드 분쟁은 잭 린치가 총리로 재임하던 기간을 규정하는 주요 사건이었다. 린치는 북아일랜드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했다. 1967년 12월에는 벨파스트를 방문하여 북아일랜드 총리 테렌스 오닐과 회담을 가졌고, 1968년 1월에는 더블린에서 다시 만났다.[7] 오닐은 훗날 린치를 "정직한 잭"이라고 칭찬하며, 그보다 더 나은 총리는 없을 것이라고 평가했다.[8]그러나 1969년, 북아일랜드에서 긴장이 고조되면서 북아일랜드 분쟁이 시작되었다. 보그사이드 전투 이후 린치는 RTÉ 방송을 통해 "현재 상황을 계속 허용할 수 없음"을 밝히고, 영국 정부에 유엔 평화유지군 파견을 요청했다.[9] 또한, 아일랜드 통일이 문제의 유일한 영구적 해결책임을 강조하며, 영국 정부와 북아일랜드의 헌법적 지위 검토를 위한 협상을 제안했다.[10]
린치의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다"는 발언은 일부 아일랜드 내 유니온주의자들에게 군사 개입 암시로 해석되기도 했지만, 실제 군사 개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린치는 아마겟돈 작전 연구를 의뢰했지만, 내각 대다수는 군사 개입에 반대했다. 패트릭 힐러리 외무장관은 영국 외무장관과 회담을 갖고 유엔을 방문하여 평화유지군 파견을 요청했지만, 큰 성과는 없었다.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영국 공수 연대에 의해 무장하지 않은 민간인 14명이 사망하면서 아일랜드 전역에서 반영국 감정이 고조되었고, 더블린의 영국 대사관이 방화되기도 했다. 이러한 긴장 속에서도 당시 영국 대사 존 펙 경은 린치의 용기와 끈기를 높이 평가했다.[11]
5. 1. 2. 무기 위기
1970년, 강경 공화주의자였던 닐 블레이니 농업부 장관과 찰스 호이 재무부 장관이 임시 IRA를 위해 10만 파운드의 지원금을 무기 수입에 사용하려 했다는 혐의가 제기되었다. 이들은 나중에 법정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이후 한 사건에서 그 판결에 이의를 제기하는 질문이 제기되었다.[12] 린치는 초반에 머뭇거렸지만, 결국 두 장관을 해고했다. 미컬 오 모란 법무부 장관은 그 전날 사임했으며, 케빈 볼랜드 장관과 그의 의회 비서는 호이와 블레이니를 지지하며 사임했다.무기 위기로 알려진 이 사건으로 인해 린치는 정부를 장악할 수 있었지만, 결국 앞으로 수십 년 동안 피아나 페일에 깊은 분열을 초래하게 되었다. 현재 일부에서는 린치가 이러한 활동을 알고 있었고, 가르다 특별부가 야당 지도자에게 알리고 언론에 제보하겠다고 위협했을 때 어쩔 수 없이 행동했다고 믿고 있다.[12] 이 사건은 북아일랜드 문제에 대한 린치의 태도와 피아나 페일 당 정책 적용에 대한 논란을 불러일으켰지만, 린치는 강력하고 단호한 지도자임을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5. 2. 야당 대표 (1973-1977)
1973년 총선에서 피네 게일과 노동당의 국민 연합에 패배하면서 린치는 총리직에서 물러나 16년 만에 처음으로 야당 의석에 앉게 되었다. 리암 코스그레이브가 총리로 선출되었으나, 린치의 인기는 여전하여 야당 대표 재임 기간 동안 "진정한 총리"로 불리기도 했다.권력을 잃은 동안에도 린치는 몇 가지 성과를 거두었다. 무기 위기 당시 지도력 경쟁자들을 제압하고 당을 완전히 장악했으며, 1973년 국민 연합의 유력 후보 톰 오히긴스를 누르고 어스킨 H. 차일더스를 아일랜드 대통령으로 당선시켜 피아나 페일의 재집권 발판을 마련했다.
1975년, 린치는 찰스 호이를 건강 담당 대변인으로 복귀시키는 것을 허용했는데, 이에 대해 언론의 비판이 있었다. 같은 해, 외무 담당 대변인 마이클 오케네디는 북아일랜드에서 영국군 철수를 요구하는 피아나 페일 정책 문서를 발표했다. 린치는 이 문서에 만족하지 않았지만 막지는 않았다.
아일랜드 대통령 케어발 오 달라이가 국방부 장관 패디 도네건에게 "천둥 같은 수치"라는 비난을 받고 1976년 사임하면서 국민 연합에 대한 논란이 이어졌다. 리암 코스그레이브 총리는 도네건 장관의 해임을 거부했고, 정부의 인기는 떨어졌다. 린치의 정치적 동맹이자 전 피아나 페일 내각 장관이었던 패트릭 힐러리가 오 달라이의 뒤를 이어 여섯 번째 아일랜드 대통령으로 (선거 없이) 지명되었다.
5. 3. 두 번째 임기 (1977-1979)
1977년 총선에서 승리하여 다시 총리직에 복귀한 린치는 경제 문제와 당내 갈등에 직면했다. 총리 재임 기간 동안 직업 상해 수당, 퇴직 연금, 배우자 유기 수당 도입과 단독 소득자의 실업 수당 지급률 증가 등의 사회적 이니셔티브가 시행되었다.[13] 1967년에는 해고 수당 제도가 도입되었고, 1970년에는 출산 보험이 모든 여성 근로자에게 확대되는 등 여성 복지에 대한 다양한 개선이 이루어졌다.[14] 또한, 무상 중등 교육이 도입되고, 대중교통 무료 이용 혜택, 처방약 비용 환급 등의 정책도 시행되었다.[15]두 번째 임기 초, 린치는 다음 총선에 출마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1980년 1월을 은퇴 시점으로 고려했지만, 확정하지는 않았다. 압도적인 의회 다수와 새로운 지도자 물색이 겹치면서 당 기강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1979년 유럽 의회 선거에서 피아나 페일은 35% 미만의 득표율을 기록했고, 5개월간 이어진 우편 파업으로 전국적인 분노가 야기되었다. 임시 IRA는 마운트배튼 경을 암살하고, 다운 주 워렌포인트에서 영국 군인 18명을 살해했다.[16]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와의 안보 협력 강화 논의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실 드 발레라 하원 의원이 지도부에 공개적으로 도전하면서 린치는 당의 기강을 확립하려 했으나, 드 발레라는 북아일랜드 문제에 대한 당 정책에 반대하지 않았다고 지적하며 린치에게 굴욕적인 결과를 안겼다.[16]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아일랜드 방문은 린치에게 잠시 휴식을 주었지만, 11월 미국 방문 직전 린치는 연말 사임을 결정했다. 코크 시와 코크 북동 보궐 선거 패배와 ''워싱턴 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국경 간 항공 회랑 합의를 주장한 것이 피아나 페일 내에서 논란이 되었다.[17] 귀국 후 린치는 실 드 발레라, 빌 로프네인, 톰 맥엘리스트림 등에게 공개적으로 맞섰고, 로프네인은 회의 세부 사항을 공개하며 린치를 비난했다.[18]
조지 콜리는 린치에게 조기 사임을 권유했고, 린치는 1979년 12월 5일 피아나 페일 대표직에서 사임했다. 찰스 호이가 대표 경선에서 콜리를 이기고 타오이섹이 되었다. 린치는 1981년 총선까지 하원 의원으로 데일에 남았다.
5. 3. 1. 경제 정책
1977년 선거 공약에서 피아나 페일은 다양한 새로운 경제 정책을 약속했다. 이러한 정책에는 자동차세 폐지, 주택 재산세 폐지 및 기타 여러 표심을 얻기 위한 "당근책"이 포함되었다. 아일랜드의 부진한 경제를 활성화하고 이러한 새로운 정책을 시행하기 위해 새로운 경제 계획 및 개발부가 설립되었다. 정부는 주택에 대한 재산세를 폐지했고, 1977년에서 1979년 사이에 실업률이 10만 6천 명에서 9만 명으로 감소했지만, 시행된 다른 조치는 그다지 생산적이지 않았다. 1978년, 아일랜드 경제는 선진국 중 가장 큰 적자인 17.6%의 적자를 기록했다. 같은 기간에 국가 부채는 20억파운드 증가했고, PAYE 근로자의 시위 행진, 전기 요금 인상, 그리고 1979년 석유 위기 또한 정부와 경제 정책에 문제를 야기했다.5. 3. 2. 당내 갈등
1978년은 당 기강에 대한 최초의 공개 반란이 일어난 해였다. 조지 콜리 재무부 장관이 농민들에게 2%의 부과금을 부과하려 했을 때 많은 초선 의원들이 공개적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부과금은 유권자들 사이에서 널리 지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콜리는 초선 의원들의 요구와 정부의 권위가 흔들리면서 굴욕적인 철회를 강요받았다. 특히 부과금 철회가 대규모 시위로 이어지면서 더욱 그러했다.찰스 하우이 보건부 장관은 처방전으로 피임을 가능하게 하는 1979년 건강(가족계획) 법안을 제안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으며 하우이에 대한 깊은 증오심을 가지고 있던 짐 기번스 농림해양부 장관은 이 법안에 출석하여 투표하지 않았다. 이는 피아나 페일에서 하원 의원, 특히 장관이 당론을 무시하도록 허용된 유일한 사례였으며, 린치가 그 장관을 정부에서 해임하고 의원 총회에서 제명하지 못하면서 린치의 권위에 손상을 입혔다. 이뿐만 아니라, 초선 하원 의원 그룹은 지도자 선거가 발생할 경우 찰스 하우이를 지지하는 다른 하원 의원들에게 로비를 시작했다. "5인조"로 알려진 이 그룹은 재키 페이, 톰 맥엘리스트림, 션 도허티, 마크 킬릴리아 주니어 그리고 앨버트 레이놀즈로 구성되었다.
6. 은퇴 이후의 삶과 유산
린치는 1981년 정계에서 은퇴한 후 아이리쉬 디스틸러스, 스머핏-스톤 컨테이너(스머핏), 아비바 그룹 아일랜드(히버니언 보험) 등 여러 기업의 이사로 활동하며 사회에 기여했다. 게일 스포츠 협회 등 여러 단체로부터 존경을 받았으며, 1999년 코크 시의회는 리 강 아래의 잭 린치 터널을 그의 이름을 따 명명했다. 사후에는 코크 블랙풀 지역의 린치 생가에 기념 명판과 조각상이 설치되었다. 그는 다니엘 오코넬 이후 가장 인기 있는 아일랜드 정치인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6. 1. 은퇴 이후의 삶
린치는 정치에서 은퇴한 후 여러 회사로부터 제안을 받았다. 그는 아이리쉬 디스틸러스, 스머핏-스톤 컨테이너(스머핏) 및 아비바 그룹 아일랜드(히버니언 보험)를 포함한 여러 회사의 이사로 활동했다. 또한 해외 여행도 많이 다녔다. 그는 고향인 코크 시의 자유 시민으로 추대되었다. 데스몬드 오말리가 피아나 페일에서 추방당했을 때 그를 지지하는 등 정치 문제에 대한 발언도 계속했다. 린치는 아일랜드 대통령 지명도 거절했는데, 이는 그가 별로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1992년, 그는 건강이 심각하게 나빠졌고, 1993년에는 뇌졸중으로 시력을 거의 잃을 뻔했다. 이후 그는 아내 마이린과 함께 자택에 머물며 건강 문제로 고생하면서 공적인 삶에서 물러났다.린치는 게일 스포츠 협회를 비롯한 여러 단체로부터 계속 존경을 받았다. 1999년, 리 강 아래에 있는 잭 린치 터널은 코크 시의회에 의해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그의 사후에는 코크의 블랙풀 지역에 있는 그의 어린 시절 집에 명판이 세워졌고, 벤치에 앉아 있는 그의 조각상도 세워졌다.
1999년 10월 20일, 린치는 더블린 도니브룩의 로열 병원, 도니브룩에서 8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국장으로 치러졌으며, 아일랜드 대통령 메리 맥알리스, 타오이섹 버티 아헌, 전 타오이섹 존 브루튼, 앨버트 레이놀즈 및 찰스 호이를 비롯한 다양한 정당의 정치인들이 참석했다. 관은 더블린에서 코크로 운구되었고, 시내 거리를 행진하는 동안 코크 역사상 가장 많은 인파가 모였다. 그의 고향 교구인 성 마리아와 성 안네 대성당에서 장례 미사가 거행된 후, 린치의 친구이자 정치적 동맹이었던 데스몬드 오말리가 묘지 연설을 통해 린치의 품위에 경의를 표했다. 그는 코크의 성 핀바르 묘지에 묻혔다.[1]
6. 2. 죽음과 유산
1999년 10월 20일, 린치는 더블린 도니브룩의 로열 병원, 도니브룩에서 8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국장으로 장례가 치러졌으며, 아일랜드 대통령 메리 맥알리스, 타오이섹 버티 아헌, 전 타오이섹 존 브루튼, 앨버트 레이놀즈, 찰스 호이 등 여러 정당의 정치인들이 참석했다. 관은 더블린에서 코크로 운구되었고, 시내 거리를 행진하는 동안 코크 역사상 가장 많은 인파가 모였다. 성 마리아와 성 안네 대성당에서 장례 미사가 거행된 후, 린치의 친구이자 정치적 동맹인 데스몬드 오말리가 묘지 연설을 통해 린치의 품위에 경의를 표했다. 린치는 코크의 성 핀바르 묘지에 묻혔다.
잭 린치는 "다니엘 오코넬 이후 가장 인기 있는 아일랜드 정치인"으로 묘사되었다. 이 칭찬은 린치의 동료나 소속 정당이 아닌, 린치가 총리로서 첫 임기를 마친 후 그의 뒤를 이었던 피네 게일의 전 대표 리암 코스그레이브에게서 나왔다. 린치는 운동선수 시절 얻은 정직함과 페어플레이 정신을 정치 생활에도 그대로 가져왔다.
게일 스포츠 협회를 비롯한 여러 단체는 린치에게 꾸준히 존경을 표했다. 1999년 코크 시의회는 리 강 아래의 잭 린치 터널을 그의 이름을 따 명명했다. 사후에는 코크 블랙풀 지역의 린치 생가에 기념 명판이 세워졌고, 벤치에 앉아 있는 그의 조각상도 설치되었다.
7. 역대 정부
- 아일랜드 제12차 정부 (1966년 11월 – 1969년 7월)
- 아일랜드 제13차 정부 (1969년 7월 – 1973년 3월)
- 아일랜드 제15차 정부 (1977년 7월 – 197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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